韩国儒林
儒家教诲之徒。主要是指朝鲜时代的士大夫阶层。用于指代朝鲜初期既得权书生勋旧派和非既得权士林派,意思是不管以后的岭南、喜好学派或思索党派,都是“书生们”。在朝鲜时代,既得权阶层的“士大夫”们为了继承和发展自己的既得权,进行了科举考试。既然科举是以儒教项目为标准出题的,“士大夫”一词作为另一种名称使用。 从此以后,士大夫中没有官职的人多了起来[1],为了严格地区分,也使用了与士大夫比较,包括没有官职的士大夫。 在旧韩末,儒林的一部分组织义兵展开了抗日运动,在日本帝国主义强占时期,金昌淑等人投身于独立运动,但势力大幅萎缩,而且很多地方儒林对日本帝国主义的殖民统治保持沉默或表现出了亲日行为。[2]解放以后,在金昌淑的主导下,全国召开了聚集了1000多名学生的全国儒林大会,成均馆大学再建为4年制综合大学,但事实上丧失了社会影响力,成均馆大学最终也因为财政困难而不得不移交经营权。[3]之后可以说是儒林最后领导人的金昌淑离开了人世,就连仅有的存在感也几乎消失了。因此,现代的“儒林”仅是指儒教相关人士或团体,是一个非常笼统、模糊的概念。 在大韩儒林学会等名称中也被使用。 以儒林为题材的着名小说有儒林外史,崔仁浩也曾写过小说《儒林》。
儒敎의가르침을따르는무리를말한다. 主로朝鮮時代의士大夫層을일컫는다. 朝鮮超中期의 旣得權선비인勳舊派와非旣得權士林派 모두를指稱하는데에도쓰이며以後의嶺南, 畿湖學派或은四色黨派相關없이'선비들'이라는 뜻을가진다.朝鮮時代에는旣得權層이었던'兩班'들은自身의旣得權을繼承發展시키기위하여過去試驗을치뤘으며過去試驗은당연히儒敎的인項目을基準으로出題되었던만큼儒林이라는單語는兩班,士大夫를다른말로가리키는 名稱으로도 使用되었다. 以後 兩班이라 하더라도 官職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졌고[1] 이에 엄밀히 區分하기 위하여 官職을 가진 士大夫들과는 對比되어 官職을 가지지 않은 선비들을 包括하는 單語로도 쓰였다. 舊韓末에는 儒林의 一部가 義兵을 組織해서 抗日運動에 나섰으며, 日帝强占期에도 金昌淑 等이 獨立運動에 投身했으나 過去에 비해서 世가 크게 萎縮되었고, 相當數 地方 儒林들은 日帝植民統治에 沈默하거나 오히려 親日行脚을 보였다.[2] 解放 以後에 金昌淑의 主導로 全國에서 1000餘名이 結集한 全國儒林大會를 開催하고 成均館을 4年制 綜合大學으로 再建하지만, 事實上 社會的 影響力은 喪失했고 성균관대학교度 結局 財政難 때문에 運營權을 넘겨야 했다.[3] 以後 儒林의 마지막 指導者라고 할 수 있는 金昌淑이 世上을 떠나면서 그나마 있던 存在感마저 거의 사라졌다. 이 때문에 現代의 '儒林'은 단순히 儒敎 關聯 人士나 團體를 모두 뜻하는 매우 包括的이고 模糊한 槪念으로 남게 되었다. 大寒儒林學會 等의 名稱에도 使用되고 있다. 儒林을 다룬 有名한 小說로 儒林外史街 있고, 최인호도 '儒林'이라는 小說을 쓴 바 있다.